난초이야기

프로필이미지
Site관리자
2022.10.24
1950

특집 이도다완 1편) 반도체의 시작은 조선의 이도다완

image

 

두 손으로 들어올린 찻사발, 우주를 삼켜버릴 것 같은 당당함이 - 세계일보 -

2013.11.11

이도(井戶)다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놀라게 된다.

양 손에 들어오는 크기지만 우주를 삼켜버릴 것 같은 당당함이 있다. 그러면서도 어떤 권위나 의도마저도 없어 보여

무한한 모성의 포용력을 닮았다.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인 고려불화의 중성적 미감이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중성미는 천연의 미라는 점에서

미감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이도다완을 벗삼아 한국 다완의 미감을 찾아가는 여정에 나선다.

이도다완에 대한 일본의 견해는 두 가지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잡기설(雜器說)과 하야시 세이조의 제기설(祭器說)이다.

널리 알려진 ‘막사발론’은 야나기의 잡기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 서민의 생활도자기가 일본에서 고급 다완(찻사발)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 학계는 물론 국민 대다수가 이도다완을 조선의 막사발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일본에선 조선시대에 건너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다완을 모두 ‘고려다완’이라 부른다.

다완이 너무 귀했기에 일부 조선 생활 도자기가 다완으로 용도가 바뀐 경우도 간혹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인이 막사발에서 우리 도자기의 가치와 미감을 발견해서 다완으로 귀하게 썼다는 논리는 비약이다.

이는 조선인이 몰랐던 도자기의 가치를 일본인이 찾아줬다는 말과 같다.

어찌 됐든 분명한 사실은 이도다완이 만들어질 당시부터 가루차용 찻사발이라는 점이다.

당시 조선에서 가루차를 마셨다면, 이도다완은 우리 문화에 의한 우리 다완이다.

만약 가루차를 마시지 않았다면, 일본과의 교역을 위한 수출용 도자기거나 일본인의 주문에 의한 일본인의 도자기다.

다완은 만들기 어려운 도자기로 가격도 높았다.

조선 말 민영화된 분원(分院) 자기를 나라에 진상한 가격표를 보면 차관 1냥5전, 찻종 7전, 자완(磁椀) 1냥7전, 점다기 7전, 점다종 7전, 보아 2전5푼∼8전, 술잔 7전이었다.

다완(자완)의 값이 유독 비싼 것을 알 수 있다. 요즘도 다완은 물레성형이 숙련된 물레대장이 아니면 만들 수 없다.

그만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image 

 

image 

 

조선 문인들은 차 마시는 일에 비중을 두고 상당히 공들였다.

조선 초 학자이자 문인인 김시습(1435∼1493)은 차를 마시는 ‘금오다실’이라는 방이 있었을 정도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고경명(1533∼1592)은 1565년 겨울에 “오직 한스러운 건 육우의

다경(茶經)이 빠진 것이라”고 했고, 1585년 겨울에 쓴 시에서 ‘山城茗椀(산성명완)’이라는 찻사발에 크게 만족했다.

하나의 산성과 바꿀 만한 명완이라는 점에서 이도다완을 두고 한 말로 추정된다.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1595∼1671)은 “지난 열흘 동안 침석에 누워서 오랜 벗처럼 다구와 함께했네”라고 했다.

1617년 8월23일, 일본에 사신으로 간 오윤겸(1559∼1636)에게 일본 측에서 접대로 내놓은 것이 찻잎과 차맷돌(茶磨)

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도 가루차를 마셨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6세기 일본은 중국에서 들여온 차문화 영향으로 중국, 조선, 동남아시아에서 도자기를 수입하던 도자기 수입국이었다.

높은 도자기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음에도 도기에서 자기로 이행하는 도자기 제작기술은 발달하지 못했다.

지배층을 중심으로 다도가 유행하자 그들이 원하는 다완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됐다.

일본다도 형식을 완성한 센리큐(1522∼1591)는 1588년 다회에서 깨진 쓰쓰이쓰쓰(筒井筒) 이도다완을 수리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치기도 했다. 쓰쓰이쓰쓰 이도와 일본 오사카성과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일본다도는 차를 마시는 행위를 높은 수준의 생활예술로 승화시켜 왔다.

일본 문화의 핵심들이 녹아들면서 ‘미의 종교’로 일컬어질 정도다.

다도가 미의 종교로 추앙받는 데에는 센리큐의 공이 컸다. 이도다완의 가치를 일본다도에 끌어들인 인물이다.

이도다완은 1578년 한 해만 해도 일본의 특정 가문이 개최한 다회 기록에 481회나 등장하고 있다.

1588년 센리큐의 수제자 야마노우에 소지(山上宗二)는 “이도다완은 천하제일의 고려다완이다 (井戶茶碗是天下一之高麗茶碗)”라고 극찬했다.

센리큐의 생존 당시라 바로 스승의 생각이기도 했다.

찻사발과 술잔의 모양도 엄격하게 달랐다. 고려 말 문신 홍규(?∼1316)는 시에서 “술잔은 모름지기 항상 가득해야 하나, 찻사발은 반드시 가득 부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찻사발의 몸통 선은 반원에서 역삼각형에 가까운 사발로 구연부를 두 손으로 잡고 마셨다.

최근 중국 허베이성 징싱현에서 발굴된, 늦어도 1190년에 그려진 중국 금나라 2호 묘실벽화를 보면 묘주 부부가 두 손으로 다완을 잡고 차를 마시는 광경이 있다. 다완의 크기를 대략 추정하면, 구경이 13∼15㎝ 내외로 가루차를 마셨던 다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우리 차문화를 추정해 볼 수 있는 벽화다.

가루차는 뜨거운 물에 가루를 넣고 찻솔로 휘저어서 마시는 탁한 차로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했고 조선 초까지 지속됐다.

 

image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나라 전체가 경제적으로 피폐해지면서 차문화가 점차 쇠퇴하여, 문인과 승려 간에나 가례 때 드물게 행해졌다.

1692년 네덜란드의 위트센(Nicolas Witsen·니콜라스 비천)이 간행한 ‘조선국기(朝鮮國記)’에 “조선 땅에는 많은 차가 생산되고 있다. 그것을 가루 내어 뜨거운 물에 타먹는 데 온몸을 찌푸리는 듯이 마신다”고 했다.

허균(1569∼1618)이 ‘새 차를 마시다(飮新茶)’는 시에서 “처음으로 용단차를 쪼개 낱알처럼 펴 놓으니 밀운차(최고급 왕실용 가루차)와

같지 않는가(新劈龍團粟粒鋪, 品佳能似密雲無)”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가루차를 만들어 마셨음을 알 수 있다.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처음에 차는 달여서 탕으로 마셨다.

가례에서는 가루차를 잔 속에 넣고 끓인 물을 부은 다음 찻솔로 휘젓는데, 지금 일본 차가 모두 이와 같다”고 했다.

가루차를 만드는 방법은 물이 끓는 탕관(湯罐)에 가루차를 넣어 휘저어 끓여 떠서 마시는 방법과 찻사발 속에 가루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찻솔로 휘저어 마시는 방법이 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소바(蕎麥)다완, 이도다완 등은 모두 후자에 해당된다.

따라서 다완의 안쪽 아랫부분의 형태를 보면 가루차가 잘 섞이도록 둥글게 만들어져 있다.

이는 소바다완이나 이도다완이 생활도자기가 아닌 가루차에 맞게 만들어진 다완임을 말해준다.

 

image 

 

이도다완은 그릇 내면 아래가 둥굴게 움푹 들어가 있는 것을 얼른 보면 알아보기 힘들다.

소바다완보다 미적인 면에서 진화된 찻사발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도다완은 15세기 말 16세기 초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등장한 다완이다.

분청사기의 백가쟁명 시기가 피워낸 꽃이라 할 수 있다.

16세기 우수한 조선 사기장의 고도의 제작기술과 다인의 높은 안목(미감)이 합세해 탄생된 걸작이다.

일본의 대표적 다완인 라쿠(樂)다완이 우라센케 다도가문과 도공의 만남에서 만들어진 것과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도다완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최고급 가루차 다완으로, 일본에서도 최고급 가루차 다완으로 쓰였다.

한국도자사에서 다완의 위상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

생활문화의 꽃이 다도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일본의 다완에서 조선 도자기의 영향이 체계적이면서도 독특하고 풍부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댓글 1개
  • Zaproxy alias impedit expedita quisquam pariatur exercitationem. Nemo rerum eveniet dolores rem quia dignissimos.
로그인하기
Contact Us
  • 주소: 인천 남구 주안동 989-1 1802호

  • TEL : 1661-2354  FAX : 070-7545-4583
  • Email: keynote28@naver.com
  • 푸터 블로그배너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