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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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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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이도다완 3편) 매화피의 비밀. 치명적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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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유약·불의 조합… 이도다완 ‘梅花皮’에 전율을 느끼다 - 세계일보 - 2013.12.09

이도다완의 우수성을 거론할 때 빼놓지 않는 부분이 굽 주변과 밑의 오돌토돌한 매화피(梅花皮)다.

처음엔 우연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유약이 단순히 물방울처럼 송글송글 맺혀져 있는 모양에서부터 기포구멍이 숭숭 뚫려 투각처럼 떠있는

모습도 있다.

어떤 것은 갈라져 주저앉은(들러붙은) 모습을 띠기도 한다. 매화 등걸을 연상시킨다.

차인과 도공들은 우연의 산물인 이 매화피에서 색다른 미감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생물의 우성인자처럼 여겨지면서 지속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할 수밖에 없었다.

흙과 유약, 불의 조합을 통해 우연이 아닌 필연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현재 도쿄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에서 열리고 있는 이도다완 특별전의 출품작 74점은 이를 유추케 해준다.

매화피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이도다완은 10점도 안 된다.

대부분의 출품작에선 빙렬수준의 갈라짐만이 있을 뿐이다.

16세기 이도다완도 생성시기와 발전시기, 쇠퇴시기를 거쳤다는 얘기다.

늦은 감은 있지만 학계가 나서 절정기의 이도다완을 표본으로 삼아 상, 중, 하로 매화피의 미감 등급을

분류해 줄 필요가 있다.

네즈미술관 이도다완 특별전에 가장 귀한 손님으로 기자에몬 이도다완이 초대됐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기자에몬 앞에서 가장 오래 머문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동안 기자에몬이 찬사를 받고 일본 국보로 지정된 가장 큰 이유는 매화피의 아름다움에 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기자에몬에서 매화피의 진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 세월 다완으로 쓰이면서 그

아름답던 매화피가 대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 자리엔 대신 검게 찻물과 세월의 때가 입혀져 있을 뿐이다. 이조차 일본인들은 색다른 볼거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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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몬처럼 매화피가 아름답기로 정평이 났던 도코나쓰(常夏) 이도다완도 지금은 그 이름에 걸맞은

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꿈틀거리는 매화피의 모습이 상하의 무르익은 자연경관을 떠올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무색할 정도다.

왜 그럴까. 몇백년 전 청춘기의 이도다완 모습을 보고 평했던 내용이,이제 노인이 된 이도다완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노인이 된 얼굴에서 젊은 시절의 홍안을 찾기란 쉽지 않다. 현존하는 이도다완은 모두 전해 내려오는

전세품이다.

땅에서 출토된 출토품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동안 실생활에서 쓰였기에 깨졌거나 손상된 것이 많다. 매화피의 손상이 특히 심하다.

세상에 나왔을 때 본래의 모습을 거의 짐작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다행히 세계일보가 발굴한 16세기 이도다완은 거의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기자에몬 등의 청춘시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매화피의 전형적인 미감은 물론 색감이나 촉감의 잣대가 되기에 충분하다.

일본의 도자전문가 오니시 마사타로(大西政太郞)는 ‘도예 유약(陶藝の釉藥)’에서 기자에몬의 색감이나

촉감을,두부를 납작하게 썰어 기름에 튀겨낸 ‘유부(油腐)’와 같다고 했다. 이는 이도다완의 표피를 가장

잘 설명한 말이다. 놀랍게도 세계일보가 발굴한 이도다완의 경우도 이 같은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

 

 

세계일보가 발굴한 16세기 이도다완의 밑굽과 매화피 부분.

 

최근 일본의 대표적 다도가문인 우라센케(裏千家)의 제15대 센겐시쓰(千玄室·90) 대종장은 세계일보가

발굴한 이도다완을 접하고 매화피를 극찬했다.

“매화피가 정말 좋아요. 크기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점점 작아지면서 조용히 사라지는 게 보이죠.

이 정도 매화피는 드뭅니다. 이것은 정말 좋습니다.

대단한 다완입니다. 센리큐가 처음 고려다완을 봤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리큐는 고려다완의 매화피를 처음 봤을 때 전율을 느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도다완은 16세기 중후반 일본에서 새롭게 떠오른 지배계층인 일본 무사들의 절대적 사랑을 받았다.

매화피의 느낌이 그들이 사용한 도검의 손잡이 부분에 장식된 철갑상어 가죽과 흡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이도다완을 사용하다 보면, 강한 손아귀 힘에 매화피 부분이 뚝뚝 부서져 무사들에게 특별한 정서를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요즘 이도다완을 재현하는 도예인들도 매화피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하지만 성과는 미진하다.

매화피를 만들기 위해 이중시유 등 고의적인 방법까지 동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초벌구이로 억지로 흉내를

내거나, 초벌구이 후 화공약품을 뿌려 매화피를 만들기도 한다.

당연히 자연스럽지 못하고 흉측한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도다완은 그 자체가 신비롭고 귀해, 여전히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많다.

매화피 이외에도 흙, 유약, 불때기 등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쯤에서 다완이 조선 땅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됐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16세기 조선에서도 찻잔을 올려놓는 잔탁(盞托)이 쓰였다.

그렇다면 이도다완에는 어떠한 잔탁이 쓰였을까. 아마도 매화피의 깨짐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 잔탁이

쓰였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달 우라센케(裏千家)가 주관한 ‘동아시아 평화기원 헌다식’에서 나무 잔탁이 쓰였다.

만약 잔탁이 도자기였다면 이도다완의 매화피에 쉽게 손상이 갔을 것이다.

 

 

 

중국 산동성 금나라 묘에서 출토된 벽돌부조에 묘사된 잔탁에 받쳐진 다완(좌)과 ‘동아시아 평화기원 헌다식’에서 나무 잔탁에 받쳐진 이도다완.


1999년 중국 허난성에서 발굴된 1097년 조성된 송나라 이수귀(李守貴)묘 벽화에선 묘주인 부부가 마주

앉아 차를 나누고 있는 장면과 여인들이 차를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두 그림에 다완이 모두 잔탁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1097년도 송나라 이수귀(李守貴)묘 벽화에서 묘주인 부부가 차를 나누고 있는 모습.

 

이수귀 묘 벽화에 묘사된 차를 준비하는 두 여인. (그림 아래는 개성 부근에서 출토된 구리차술)

 

문헌 기록에 의하면 잔탁은 당나라 덕종(德宗), 건중(建中)연간(780∼783)에 재상인 최령(崔寧)의 딸에

의해 시작됐다.

찻잔에 받침이 없어 손을 데이자 접시에 이를 올렸지만, 마실 때마다 기울어져 접시 중앙에 밀랍으로

둥근 고리를 만들자 찻잔이 고정됐다고 한다.

고려시대 잔탁은 북송의 잔탁과 비슷하며 도기, 금속, 나무 등 다양한 재질로 제작됐다.

중국 허난성에서 1993년에 발견된 금나라(1115∼1234) 중후기에 만들어진 벽화묘엔 시녀가 잔탁에 올려진

두 다완을 큰 소반에 받쳐 내가고 있는 광경이 그려졌다.

 

 

금나라(1115~1234) 중후기에 만들어진 벽화묘에서 여인이 잔탁에 올려진 두 다완을 소반에 받쳐가고 있는 모습.


차겨루기 놀이인 명전(茗戰)에서 가루차와 뜨거운 물을 잘 섞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이수귀의 묘벽화에서 차를 준비하는 왼쪽 여인은 오른손에 뚜껑이 열린 차항아리를 들고,

왼손은 찻숟가락인 차술(茶匙, 茶戌)로 탁자에 놓인 다완에 가루차를 넣고 있다.

봉황머리 형태의 차술은 형태가 우리나라 개성 부근에서 출토된 구리차술과 매우 흡사하다.

차 거품을 잘 내기 위해 봉황머리쪽으로 가루차를 휘저었다.

2008년 중국 산시성에서 발굴된 1195년 만들어진 금나라 왕립(王立)묘 벽화에선 차와 술을 준비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왼쪽 남자는 가루차가 담긴 다완을 들고 나가려 하고, 오른쪽 남자는 대나무 차솔인 축부수(竺副帥)로

가루차를 젓고 있다.

솥물이 한참 끓을 때 들어가서 가루차를 휘젓는 모습이 전쟁터의 장수와 같다고 해서 무관인 부수(副帥)로

의인화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둥근 형태의 차솔은 이것이 개량된 것이다.

원나라 때는 가루차를 만드는 과정이 간략화되어, 차술이나 축부수 대신 빨갛게 칠이 된 나무젓가락으로

다완에 담긴 가루차를 휘젓기도 했다.

 

 

1195년도 금나라 왕립(王立)묘 벽화에 그려진 차와 술을 준비하는 모습. (그림 아래는 축부수)


잔탁에서 다완을 고정하는 부분의 높이는, 올려진 다완이 가루차인지 잎차인지를 말해준다.

잎차의 경우, 주전자에서 우려낸 차를 다완에 따르기에 따르는 물의 힘에 의해 다완이 엎어지거나 크게

움직일 위험이 없다.

따라서 다완을 고정하는 부분이 높지 않다.

이도다완 나무잔탁 고정 부분이 높은 것은 이도다완이 가루차 다완임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다완을 고정하는 부분이 높지 않으면 주전자로 뜨거운 물을 가루차에 붓는 과정에서 다완이

밀려 화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루차를 거품이 나게 잘 풀어지게 하기 위해선 주전자 물을 힘차게 쏟아부어야 한다.

이렇듯 이도다완과 잔탁은 제기(祭器)가 아니라 일상생활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

 

 

 

 

 

 

 

 

 

 

 

 

 

 

 

 

 

 

 

 

 

 

 

 

 

류ㅗㅓㅠ러ㅏㄴ유러나ㅠㄹㅇ

 

 

 

 

 

 

 

 

 

 

 

 

 

 

댓글 4개
  • 그러면 왜 한국엔 이도다완. 조선다완이  남아 있지 않느냐 ??

     

    조선 다완 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서민이 사용하는 막사발이므로

     

    굳이 귀하게 보관해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사용하다가 금이가거나 흠이 생기고.  깨지거나  음식물이 베이면

     

    미련없이 버렸다.

     

    또  전쟁이 끝나고 오랜후에

     

    나라가 점차 안정되고  새 기술이 도입되어 질 좋은  자기들이 생산되자

     

    쉽게 쓰던 막사발도 거림낌없이  버렸던 것이다 .

     

     

     

    그러나

     

    일본의  컬렉터들은  조선의 찻사발을 보통 몇점씩 소장하고 있는데

     

    그것도 문화재급 명품이 어림잡아 수백점 정도 일본에 전래되고 있고

     

    수십점이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또 일본에는 "고려다완" 혹은 " 조선 다완 " 이라는 이름으로 고급스럽게 제작된 도감과 책이 많다

     

     

    남의 나라 밥그릇을 가져다

     

    조선인에게 보라는 듯이  정성을 들여 수백년 동안 대대로 보관해 왔다 .

     

     

    그것도 신물 같이 소중이  아끼고 즐기니  ,,,,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한국인들  그리고  씨앗농부들에게   이러한  가치의 감성을 전달해야 할지

     

    생각이 많아진다 !!

     

     

    ==> 보물은 멀리 있는것이 아니다 !

    배울점이 많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도다완에 대하여 공부 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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